2011년 10월 5일 대만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입국한 나는 바로 대프니를 찾았다. 대프니는 여군이의 소개로 온라인상 알게 된 대만 친구인데, 이 친구는 미국 대륙을 누빈 경험많은 여행자이다. 2011년 당시에는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거주하고 있었다. 내 출국은 다음날 새벽 6시 체크인 세부 퍼시픽이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자기로 하였다. 저녁은 대프니를 만나서 먹고 신촌에서 젖은 빨래 건조기를 돌릴 생각이었다.
정말 재수가 없군.
真倒霉!
真的倒霉!
倒霉透了!!
이상하게 이 날부터 모든 운이 꼬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건조기는 없었다. 인천 공항 세탁소, 신촌/홍대 세탁소. 결국 내가 대프니를 만났을때는 밤 9시.
"만나서 무슨 저녁을 먹는단 말야..."
그녀의 말에 어쩔수 없이 얼굴만 보고 나는 바로 공항으로 돌아갔다. 4시간을 있지도 않은 건조기 찾느라 허비한 셈이다. 열려있는 세탁소 조차 건조기만 돌리는 건 안된다고... 세탁이라도 해달라자, 그것도 안된다고. 아주 배때기가 불렀구만.
인천공항 지하 사우나 1인 수면실을 이용하면서 안에서 빨래를 말리자! 공항에 돌아와서야 떠올랐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그렇게 난 밤 11시가 되어 잠들었다.
꿈 속에서 대만 KTV가 펼쳐져 정신없이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 6시 반. 6시에 동지들과 만나기로 했었는데... 나는 그야말로 X된 신세였다. 옷을 대충 입고 머리에 물만 축이고 카운터로 뛰었다. 이 인정머리 없는 세부 퍼시픽은 이미 체크인을 닫은 상태였다. 어쩔수 없이 나는 24만원을 더 내고 다음 비행기표를 예약했고, 8만원을 들여서 필리핀 국내선 표를 샀다.(내가 머물 곳은 일롱고스 주의 바콜로드라는 지방도시) 호스텔 알바 퇴직금으로 받은 30만원이 그냥 증발해버렸다. 너무 화가났다.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세부 퍼시픽은 연착되어 30분이 넘어서야 이륙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건 양반이다. 내가 앞으로 겪을 필리핀에서의 일은 더더욱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일들 뿐이니까...
오랜만에 가족을 보니 반가웠다. 좀 쉬었다가 다 같이 공항을 향했다. 세부퍼시픽에게 한방 먹은 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크게 깨달았다. 세상에 믿을 건 혈연 뿐이다.
저녁 9시. 나는 그렇게 이륙했고, 새벽 1시경이 되어서 마닐라에 도착했다. 4시까지 마닐라의 카오스 속에서 비행기를 기다려 최후 종착점인 지방 공항으로 향했다.
충격 먹은게, 좀 답답해서 공항 밖에 잠시 나가있다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짐 검사 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더듬으며 수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대형 마트 들어갈때도 짐검사와 주머니 무기검사를 하는 나라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새벽 6시가 되어서야 도착한 나는 피로감에 젖어있었다. 비행기를 한번 놓쳐 30만원을 날린 경험 때문에 환승 중 잠을 한숨도 못잤다. 밤 9시에 출발해 새벽 6시에 도착한 나는 완전 좀비였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좀 쉬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다. 한국에 살면 영어학원비도 비싸고, 월급받고 일해본 경험이 있는 이후로 알바도 안하면서 공부만 하자니 좀 어색했다. 무엇보다 나는 휴식이 필요했다. 근데.. 그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짧고 아주 단편적이지만, 내가 머문 지역에 대해 읊어보자면..
*음식
대만에서 한국 귀국 하는 길, 옆자리에 가이드 일을 하는 대만 사람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녀는 필리핀 음식이 매우 맛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말 음식은 맛이 없었다. 고기만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다를 뿐, 양념은 모두가 비슷했다. 게다가 짜기는 무진장 짰다. 아무리 without salt를 외쳐도 이 녀석들이 장난하자는 건지 변함없는 짠맛을 선보인다. 터키, 이탈리아, 태국, 중화요리의 풍부한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세계에서 단순한 요리에 속하는 일본의 덮밥류나 한국의 고기볶음류는 이곳에선 꽤나 복잡하고 섬세한 음식에 속했다.
나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필리피노들은 쌀을 좋아한다. 고기 한덩어리에 밥 한그릇. 그들의 방식이었다. 25년 넘도록 다양한 채소와 고기를 먹어온 나에게 샐러드가 비싼 환경은 영양 불균형을 초래했다. 물론, 기숙사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면 문제가 안되었지만, 나는 최대한 나가서 현지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다.
대량의 밥과 약간의 고기. 그리고 탄산 음료. 필리핀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때문에, 한국에서 뚱땡이 소리 듣는 나도 여기서는 세련된 몸매의 소유자였다.
맥주는 산미구엘(정확한 발음은 산미겔이지만..)이 독점했다. 하이네켄, 아사히는 대기권 밖의 이야기이다. 다행인 것이 산미구엘 라이트는 카프리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산미구엘 필슨은 깊고 풍부한 맛이 수준급 맥주였다. 하이트나 카스는 단군할배가 우리나라를 일곱번 세워도 명함 한번 못내밀 맛이었다.
전체적으로 음식이 가격은 저렴했지만 양이 적었고, 저렴한 찻집이나 식당의 경우는 음식이 나올때마다 맛이 달랐다. 패스트푸드도 체인점임에도 불구하고 위치마다 맛이 달랐고, 어떤날은 맛있지만 어떤날은 치킨에서 화학품 냄새가 나기도 하였다. 아무거나 잘먹고 잘 버티는 내가 먹으면서 괴로웠던 적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많아 매운 한식을 먹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하는 일식, 중식 식당은 없어서 곤혹을 치렀다. 일식, 중식 체인점이 있어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지만 거의 현지화되어 짜고 자극적이었다.
*자연환경
비교적 시골이라지만 공기가 나빴다. 지프니에서 내뿜는 매연과 낮은 환경 부담금... 산책과 조깅은 물건너 갔다. 학생들은 한번씩 돌아가며 기침과 가래에 시달렸는데, 우리는 이것을 풍토병이라고 불렀다. 하얀 모래, 에메랄드 빛 바다. 혹은 짙푸른 산과 화산, 온천. 이 모든 것이 다 필리핀에 있다. 하지만 내가 지낸 도시는 매연 가득한 시골도시. 강이라고 불리는 물줄기는 그냥 하수구 똥물이었다. 가끔 그 속에서 다리 걷고 쓰레기 줍는 아이들을 볼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이름을 부르며 한국어로 인사한 후, 돈을 요구했다. 점점 횡포가 심해지자 나는 그들을 어설픈 중국어로 욕했다. 나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그들에게 차마 한국인으로 쓴소리를 할순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이나 한국인에 비해 중국인은 돈을 많이 갖고 다니지 않고 약삭빠르다는 인상이 필리핀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어가 가능하다면 중국인인척 하고 다니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은 화교, 대만인, 홍콩 마카오 죄다 포함한 그런 서양인이 말하는 "Chinese"라는 개념이다..
*필리핀 사람들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특히 한국인에게 이렇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TV에서 터키가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정작 필리핀에서 만난 터키인은 필리핀 사람들보다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고 잘 몰랐다. 필리핀 사람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국인이 키가 더 크고 피부가 희기 때문에 더 보기 좋다고 생각한다. 또, 일본식 긴머리와 수염, 중국인식 직모나 스포츠 헤어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중일 중에서는 한국이 제일 잘 나간다고 여긴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지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평소에 무뚝뚝해도 분실물을 끝까지 찾아다주는 한국인이 더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핸드폰도 잃어버렸다. 60만원 짜리인데, 여기선 일반인 두달 월급이다. 그래서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내가 일본이나 한국이었다면 100%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잃어버렸다가 찾은 적이 있거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시간 약속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현지 친구들과 약속을 세번 정도 잡았는데, 한번은 무단으로 오지 않았고(나중에 알고보니 이유가 설사), 한번은 20분 늦은 상태에서 장소 변경을 요구하였고, 마지막으로는 미리 상대가 우리에게 전화하여 취소하였다.
사람들은 손재주가 없고 느리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나같은 괜찮은 영어능력 소유자조차도 15분은 족히 걸려야 한다. 종업원은 많지만 카운터는 단 한명. 사람들은 줄을 서 있다. 핸드폰을 사서 보호용 필름을 입히는 사람은 부족한 손재주로 20분이 걸렸다. 그 마저도 기포가 들어간 상태.
상대가 실수해놓고 미소지으면 내가 울화통이 터져 눈물이 날 지경이다. 때릴 수도 없고...
국민 소득의 차는 사람의 차이로 드러나게 된다. 대다수의 필리핀 사람들은 사진을 잘 찍을 줄 모른다. 싸구려 캐녹스를 주며 단체사진을 부탁하면 일부러 연구했나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정교한 최악의 구도를 만들어 찍어주고 폴라로이드를 부탁하면 허공에 대고 눌러버린다. 비싼 카메라는 들고 튀기 때문에 잘 찍는지 못 찍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여유로움을 싫어한다. 여유로움은 늑장과 게으름의 또 다른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차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군에서 4년동안 일하면서 배어버린 사고방식이다. 나도 이제는 어엿한 빨리빨리 한국인이 되었나싶다.
한국인인 것이 이렇게 좋았던 나라는 처음이다. 누구나 안녕하세요는 알아도 곤니치와는 몰랐다. 한국 핸드폰도 많고 한국 차도 많았다. 오삼불고기 같은 복잡한 한국 음식도 많이 팔았다. 가격은 비쌌지만 맛은 조잡했다.
*도시
이곳에 와서 느낀 것은 말은 제주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라는 것. 무조건 대도시가 최고다. 왜냐하면 후달리는 인프라로 너무 심심하기 때문에. 재미 없으면 의욕도 사라진다. 나는 이런 작은 시골도시에 2개월 머무르면서 군생활 하는 갑갑함을 다시금 느꼈다. 예전에 대만에서 한국으로 어학연수 온 나리에게 내가 물어본 적이 있다.
"대만으로 어학연수 가면 어디로 가는게 좋을까? 타이베이는 집값이 비싼데, 단칸반 가격이면 가오슝에선 20평 넘는 방을 빌릴 수 있다더군."
그녀가 대답하기를...
"만약 한국에서 어학연수 한다면 너는 어디에서 할래?"
나는 두말 않고 서울이라고 대답하였다.
콘택트 렌즈 파는 곳도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어쩌다 있으면 1달짜리. 혹은 싸구려 일회용. 내가 가장 원하는 원데이 아큐브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조건 현지음식을 먹고 현지 것을 입고 현지화 되는 현지조달 원칙 고수자 나는 지독하게 후회했다. 후진국 중소도시 가기전에는 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평소에 준비성 없는 나는 현지조달이라는 핑계성 독트린을 들고 이 세계로 진입했다. 게으른 것에 대한 벌인 셈이지...
*영어수준
교사들 수준도 괜찮았다. 나를 담당한 다섯명의 교사 중, 3명은 교사로서의 자질은 물론이고 실력까지 출중했다. 내가 다닌 곳은 대학교 부설 어학당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교사다운 맛이 있었다. 예전에 아는 친구가 마닐라 사설 학원 중에서 몇몇은 검증되지 않은 교사가 수업 종료되기만을 기다리는 스타일의 수업을 하여 그곳에 다녔던 자신은 곤혹을 치렀다고 했다.
길거리 사람들의 영어는 히스패닉 영어 같은 발음이다.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는 점원들도 실력이 그다지 좋진 않다. 나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이다.
I'd like to oder Meal A1.(A1세트 주세요)라고 하면, to oder의 to를 two로 듣고 2개를 주려고 한다. 내 토익 점수는 반타작 수준이지만 이곳에서는 수준급 학생에 속했다. 연수온 학생들 수준은 좀 낮은 것 같았다. 우선 나보다 발음좋은 학생을 못봤다. 아주 콩글리시 그냥 쩐다. 제발 자기 목소리 녹음하고 듣기를 반복좀 했으면 좋겠다. 발음 안좋은 건 어쩔수 없는게 아니라 필리핀에 판매하는 저렴한 갤럭시Y 스마트폰으로 자기 목소리 녹음하는 것 조차 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때문이다. 나는 영어 단어 외우는 시간 없애가며 내 목소리를 수도없이 녹음화고 듣고 고치고 하였다.(그래도 발음은 썩 좋진 않지만 최소한 무성음을 낼줄 알고, 원어민이 들으면 이해할 수준은 된다. 마치 인도인 발음처럼 말이다.)
인간들이 영어를 너무 준비 안하고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본래 4개월동안 필리핀에서 영어를 마스터하고 호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하루 4시간 일대일 교사 외에는 영어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져 2개월을 환불 받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저렴한 금액으로 단기간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기 좋은 곳은 필리핀 밖에 없는 것 같긴 하다.
*외국인 친구
나는 사실 외국인 비율을 보지 않고 왔다. 한국 사람이 많은 것도 장점이 될 수 있다. 우선 정보 네트워크가 훌륭하다는 점. 그리고 필리핀 연수 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한국인이다. 그밖에 가끔 일본인과 중국인도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일본인 매니저 아야카 쨩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일본인은 대다수 호주나 뉴질랜드로 가는데, 필리핀에 오는 부류는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 나는 운좋게 중국인 학생을 사귀게 되었다. 문제는 이 친구의 한국어 실력이 너무나도 출중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친구와 여기저기 다니며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 야 이 녀석들아, 너희는 영어에 올인하지? 나는 영어도 너희보다 잘하고 중국어까지 할줄 안다... 라며 큰소리로 중국어를 떠들었다. 역시 나처럼 가진게 없는 사람일 수록 잘난척 하기를 좋아하는가보다.
내 꿈이 한국-중화권-일본을 하나로 묶는 삼화주의, 동아시아연합 건설인데, 때문에 나는 중국어 사용자(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동남아시아 화교사회 출신자)와 일본인을 다른 외국인에 비해 매우 좋아한다. 운좋게도 중국인 친구에 이어 일본인 친구도 사귀었다. 아야카 쨩이라고... 그녀는 일본인 매니저 업무로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곧 일본인 학생들이 올 예정이었다. 일본어 구사가 가능한 나는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녀의 판단. 그래서, 그녀는 나를 필요로... 또 나는 예쁜 그녀를 필요로 해서 일종의 win-win이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친구라고 하기보다 거래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이 도시에서 1년정도 살았던 것 보아서는 털털하고 뛰어난 적응력의 소유자 같았다. 한국은 6번이나 들락날락 거렸고, 영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이상하게 꽤 알고 있었다. 또 내가 수준이 낮긴 해도 일본어 회화가 가능하고, 영어/한국어/일본어 섞어 대화하면 소통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이건 완전 내 스타일인데... 자면서도 만나는 꿈꾼적도 있다. 그녀랑 평생 살라면 이런 후미진 필리핀 시골 도시에서 평생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다음주면 대만을 통해 한국으로 귀국해야한다. 내 목표는 여자 만나는게 아니라 삼화주의이다. 아쉽지만, 바이바이.
*연설대회에 참가하다
아 나는 여기를 나가야겠어!
총책임자인 학습부장인가 하는 분을 만났다. 만나서, 지금까지 버틴건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버텨야할 날은 환불받고 학교를 떠나고싶다고 하였다. 학습부장은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도 그럴게, 이곳에 부모님 돈으로 유학와서 환불 받은 뒤, 필리핀 전국을 여행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나보다. 나도 그런 부류 중 하나가 아닌가 싶은게 그분의 생각일 것이다. 나는 조건을 걸었다. 곧 있으면 학교에서 영어 연설대회가 있는데, 거기서 시상하면 환불받고 떠나기로.
그렇게 나는 연설 대회에 참가했다. 지난번은 참가자 7명이었다고 한다. 보통 대상, 우수상, 장려상 두명 정도 주는 것 같으니, 4등만 들면 되겠다 싶었다. 아무리 내가 머리가 나빠도, 나름 영어를 좋아하는데 50%도 못들겠냐는 생각이 들어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16명이 넘었다. 걱정과 긴장. 그리고 작은 기대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모두가 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온 학생들. 혼자 돈내고 온 고졸 찌질이는 나 뿐이었다. 나는 준비하는 과정에서 멋들어진 연설문을 써, 교사에게 보여주며 문법적인 오류를 잡아달라고 하였다. 또한 정확한 표현을 요구하여 마침내 기나긴 5분짜리 문장을 완성하였다. 이걸 다 외워야 하다니...
그나저나, 사람들은 본질을 왜곡시키기를 좋아한다. 막상 대화가서 들어보니 이건 말하기 대회가 아니라 거의 암기대회였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시작 직전까지 다 못외우고 포인트만 잡고 즉석에서 말을 했다. 교사들이 수정해준 올바르고 고급스런 표현대신 내가 즉석에서 지어낸 저질표현으로 최대한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려 노력했다. 다들 대학생 무리로 와서 학생들이 무대에 설 때마다 환호성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자비내고 공부하러 온 왕따여서 내 차례였을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자 다들 웅성대었다.
"오, 쟤 영어좀 들어봐!"
쾌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결과는 2등. 실력 자체로 놓고 보면 내가 1등인데. 공식적인 이유는 제스처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리처드 닉슨 보다 다양한 제스처를 구사했다.(참고로 닉슨 대통령은 V자 제스처 말고는 별로 손을 안움직이는 듯)
내 생각에는.. 이건 파벌 문제같다. 나는 소속이 없는 녀석이었고, 상대는 대학 소속이었다. 대학이 돈들여 필리핀 영어학원으로 대량의 학생을 보내주면 영어학원 측에서도 응당 대학교에 이득이 되는 짓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심사위원은 일등보다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행사가 끝난 후, 심사위원이 내게 다가와 "당신의 영국식 억양을 구사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당신의 발음을 듣는 순간 전율(Goosebumps)했어요."라고 말했다. 됐네요. 이 사람아... 1등 안줄거면 그냥 조용히 꺼지세요. 실력 이 외의 것으로 순위를 정하는 심사위원놈의 칭찬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그리고... 딱히 내 영어가 영국영어라고 할수 없는게... 나는 영국식 문법과 표현을 잘 모른다. 난 화장실도 restroom이라고 말한다. 단지 2006년 영어학원을 잠깐 다닐때 날 담당하던 교사가 남아공 사람이라 그런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딱딱하고 혀 움직이기를 게을리 하는 그 남아공 발음이 항상 미국발음에 젖어 살던 필리핀 인들에게는 아주 특이한 영국 발음으로 들렸나보다.
어학당에서 학습부장인지 뭔지 하는 좀 높아 보이는 어르신도 와서 내 모습을 봤다. 대회가 끝나자 다른 사람 제쳐두고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호주나 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에서 연수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없지! 나는 돈이 없으니까. 영어권 국가에서 연수를 했으면 뭐하러 필리핀 오겠냐... 상식밖의 양반을 봤나... 내게 있어 영어라곤 학원에서 남아공 선생 아래 6개월 다닌 것 밖에 없다고.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미군부대 안에 위치한 공군부대에서 4년간 복무한 것 정도. 그닥 큰 도움은 안되었지만... 주일에 성경공부하러 미군교회가면 맨날 포르노 보면서 자위행위 하는 사람 손들어보라고나 하고, 어떤 상황이 우리의 성욕을 자극하는지... 성경과 의지력으로 어떻게 그런 것들과 싸워나가는지 토의하고...(다들 예상하겠지만 나는 거기서도 그냥 찌그러져 있었다. 뭘 알아야 발언을 하지)
어쨋든 나는 결국 2등을 하였다. 축하를 받긴 했지만, 본래 1등을 해서 4년제 대학생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겠다는 고졸자의 꿈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2등은 몰라도 1등 만큼은 모든 이해관계에 얽혀 탄생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 이날. 나는 이제부터 2등을 사랑하기로 하였다. 그날부터 리오넬 메시보다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를 좋아하기로 하였다.
아야카쨩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박수를 보내며 내가 자랑스럽다고 하였다. 적당히 포장된 일본인의 말이겠지만, 이후 계속 메시지를 주고 받아 나는 기뻤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영어권 영화가 자막없이 방영되었다. 시작할때 국가 연주 같은 건 없었다. 영화는 밥 한끼 가격에 음료 및 팝콘 미포함이었다. 리얼스틸, 파라노멀 액티비티3를 보았는데, 영화관 시설은 도시 수준에 비해 괜찮았다. 다만 사람들이 영화관에 익숙치 않은지 전화통화 하는 사람을 가끔 볼수 있었고 대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영화관 좌석은 항상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에 좀 시끄럽고 방해 된다 싶으면 자리를 옮기면 되었다. 영화관 자리는 80% 이상이 항상 비어 있었다.
*기후
필리핀은 열대국가였다. 11월에도 에어콘이 필요했다. 한낮 온도가 31도, 최저온도가 26도. 당시 대만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서울은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졌다고 한다.(내가 왜 서울 친구들을 냅두고 대만 친구들을 통해 한국 날씨소식을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맨날 바쁜척만 하는 도움 안되는 서울 친구들...)
사시사철 나무가 푸르지만 가끔 갈색 낙엽도 보인다. 모기는 기후와 상관없이 산란기에 따라 번식하는 모양인지, 모기를 본적이 없었다. 바퀴벌레는 사이즈가 다양했다. 일반 집에서 볼수 있는 소형부터 영화 '조의 아파트'에 살음직한 엄지손가락 사이즈까지... 덩치 큰놈들은 대만과 달리 몰려다니기 때문에 굉장히 역겹다. 낮에는 더워서 하수구에 숨어있다가 밤이되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가끔 볼수 있다. 벽에 태국의 찡쩍 비슷한 도마뱀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이 녀석들은 벌레 천적이다. 나는 녀석들의 열렬한 서포터이다.
*텔레비전, 수도, 전기
내가 지낸 숙소에는 호주방송, 미국방송, 영국 및 중국, 홍콩 방송이 나왔다. 참, 인도 방송도 나왔는데, 사극은 신화와 얽혀서 아주 기괴하다. 화살에 목이 잘리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건 거의 윈도 페인트(그림판)으로 만든 수준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갈색피부에 대한 자존심이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모델은 피부색이 밝은 중국/일본 혼혈. 혹은, 스페인 혼혈이다.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중에서도 눈크고 예쁘고, 머리 작고 키 큰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던데... 너희가 그런 피부색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그대들을 사랑해주리오...
수도는 엉망이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수업이 없어서 운동을 하고 샤워후 다시 오후 수업을 가곤 했는데, 그때 단수가 되거나 갈색 녹물이 나오면 오후 수업은 못하는거나 다름 없었다. 예고 없는 단수/녹물이 잦았다.
정전은 생각보다 없었다. 군대보다 없었던 것 같다. 전기세는 비싸지 않았다. 한달 내내 실내에 있는 시간동안 에어콘을 틀어대었는데도, 1600페소가 조금 넘었다. 나는 이 돈을 룸메이트와 반반 나누어 내었기에 부담이 거의 없었다.
*물가
물가는 내가 필리핀 물가를 낮게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비쌌다. 특히 사람들 소득대비율로 굉장히 비쌌다. 디자인도 별로인 옷이 메이커 달고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옷 질감도 좋지 않아 노원구 2001아울렛이나 군산시 영동 시장 돌아다니는게 더 저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밥한끼 2~3천원 했는데, 한국 8천원짜리 밥의 절반 양이었다. 실제로 한국처럼 넉넉히 먹고 다니려면 5~8천원은 들었다. 물론 대부분 필리핀 현지 음식이다. 내가 싫어하는 한인사장의 한식을 먹으면 1인당 만원 넘는다. 그돈이면 호텔 점심 뷔페를 갈수 있다. 화교 상인들이 악착같이 돈 벌어 부유해지는 모습을 보고 한국 사람들도 필리핀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지만 방식이 영 아니다 싶었다. 한국인들 상대로 한국음식을 비싸게 팔려 하고, 김치찌개 준다 해놓고 막상 가보면 김치국 차려놓고 앉았고, 쿠폰 가져가면 뭘 더 준다면서 알고보니 한 테이블 당 1개, 이런식... 거짓말 좀 작작했으면 좋지 싶었다.
2011년 12월
두달간의 어학연수를 마쳤다. 작문과 회화의 문법적 문제를 거의 해결했다. 한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하얀 모래와 에메랄드 빛 바다를 밟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나에게 필리핀에 올 마음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있다고 할 것이다. 오래 살 곳은 못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만큼 익숙한 외국이 또 없으니까. 그도 그럴게 나는 태어나서 필리핀을 포함 5개국이 전부이다. 태국 일주일, 일본 닷새, 중국 일주일씩 2회, 대만 일주일씩 2회. 그리고 필리핀은 약 2개월. 영어도 잘 통하고 관광지 자연도 아름답고 물가도 비싼 편이 아니다. 한국인에 대해 호의도 가득하고...
어제 나에 대해 특별히 애정과 열정을 갖고 영어를 도와준 교사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책 사러 갈때마다 반가이 맞아주던 책방 아줌마에게 초코파이를... 아야카쨩에게는 일본 노인네 필체를 억지로 흉내낸 편지를 써, 선물과 함께 전달하였다. 그녀는 내가 다음주에 돌아와 더 머무는 줄 알고 있어, 나의 기습공격에 크게 당황하여 새처럼 팔을 파닥거렸다. 이제 정말 가는구나싶으니, 먹다가 질린 졸리비도 뭔가 아쉬워진다. 그렇게 수 많은 오늘들이 과거로, 그 과거의 기억이 추억으로 굳어져가는동안 나는 귀국행 비행기에 발을 올렸다.
떠나는 날, 나와 함께 지냈던 룸메이트와 학급동료(모두 한국에서 알고 지냈고, 나처럼 자비를 들여서 왔음)들. 그들이 나를 전송하였다. 그들의 모습..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군대 전역자를 바라보는 그 부러운 눈빛.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환승하며, 혹독한 마지막 시련을 맞이한다.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당시 나의 페이스북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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