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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생활/축구이야기

우루과이 축구의 역사

by 돌돌이_ 2021. 2. 5.

2002년, 호르헤 다 실베이라 (우루과이 축구 해설 위원) 씀

 

I. 우루과이 축구팀 약사

우루과이의 축구는 철도 건설을 위해 우루과이로 파견된 영국 회사 직원들이 선을 보이면서 시작된다. 초기에는 관중의 수준에 머물던 우루과이 사람들은 점차 이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종래에는 그들 스스로가 공을 차기에 이른다. 영국인들은 Peñarol 기차역에 Central Uruguay Railway Cricket Club을 만드는데, 이 클럽이 바로 그 유명한 Peñarol 팀의 전신이 된다. 우루과이의 또 다른 축구팀은 Nacional로, 1899년 영국 팀에 대적하기 위해 국민 모두와 대학인의 염원이 결집되어 결성된 팀이다. 우루과이 국민의 95%가 이 두 팀의 팬이라는 사실은 우리 국민들이 축구에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늠 해준다.

이 두 팀 선수들은 각각의 성적에 따라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이 두 팀이 사실상의 국가 대표팀을 구성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많은 유능한 선수들이 외국으로 이적함에 따라 외국에서 선수들을 데려와 축구팀을 운영할 정도이지만, 국내에서 활약하는 우루과이 선수들은 바로 이 두 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두 팀의 우수성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시합에서 거둔 전적으로 입증된다. 아메리카 리베르타도르 컵 대회 (Campeón de la Copa Libertadores de América)는 가장 유명한 아메리카 대륙 클럽 팀 축구 대회로, Peñarol팀은 1회 대회에서 승리했다. 이어서 1960, 1961, 1966, 1982, 1987년 챔피언을 석권했다. 그리고 Nacional팀은 1971, 1980, 1988년도를 승리로 이끈다. 세계 챔피언 전에서 세 번이나 승리를 거둔 팀은 Peñarol팀과 Nacional팀, 그리고 이탈리아의 Milan 팀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이들의 국제적인 성가가 입증된다. 축구팀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해 온 수많은 팀들 가운데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국제 타이틀전에서 세 번이나 승리한 팀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1년부터 일본은 유럽 클럽의 우승팀과 아메리카 지역 클럽 우승팀을 초대해서 시합하는 또 다른 국제 시합을 유치하고 있다.

외국 팀과의 최초의 시합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벌어진다. 영국인이 우루과이보다 아르헨티나에 먼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양국 대결 초반에는 아르헨티나가 우세했다. 그러나, 1903년 우루과이 대표팀 Nacional은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홈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3:2 승리를 엮는다.

1910년부터 우루과이 국가 대표팀은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을 누비면서 4차례의 월드컵 제패, 14회의 남미 컵 제패라는 기록을 낳는다. 우루과이 축구 감독 Héctor Rivadavia Gómez는 1916년에 남미 축구 연맹 (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을 창설한 인물로, 이 연맹은 후에 남미 대륙 축구를 관장하는 지역 기구로 탈바꿈한다. 바로 이 해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 1회 남미 토너먼트 (Torneo Sudamericano)가 개최되며, 우루과이는 이 대회에서 승리를 거둔다. 1917년에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아메리카 컵 (Copa América) 대회가 개최되며 우루과이는 두 번째로 이 대회의 승리자가 된다.

 

II. 네 번의 세계 대회 제패

1914년 FIFA는 올림픽 경기와는 별도로 월드컵을 개최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아마추어리즘의 규약과 국제 축구 이사회의 경기 규칙이 존중되는 한, 이 월드컵 대회의 승자가 바로 세계 챔피언이라고 정한다. 1916년의 올림픽 경기가 세계 1차 대전으로 무산되고, 이어 1920년에 안트웨르펜에서 개최된 올림픽 경기의 승리는 벨기에가 차지했다.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하게 된다. 1920년대의 세 번의 세계 제패를 연출한 주역은 위대한 주장이었던 José Nasazzi였다. 강인한 체력과 결단력, 끈질긴 기질을 소유한 Nasazzi는 1924년의 Colombes경기와 1928년의 Amsterdam 경기에 참여했으며, 1930년에 몬테비데오에서 개최된 제 1회 월드컵 대회의 주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혁혁한 전과를 거둔 당시의 선수들을 우리는 “올림픽 세대”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1924년에 유럽 프랑스에서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팀을 이끌고 참가하기 위해서 Atilio Narancio감독은 자신의 집을 저당 잡혀야 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서는 선수들 각자가 차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스페인에서 여러 차례의 연습 경기를 치른 후, 우루과이는 실전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단지, 네덜란드만이 골 공세를 막기 위해 8명의 수비수를 배치하는 전법을 사용해서 2대 1로 무릎을 꿇었을 뿐이다. 유고슬라비아는 7대 0으로, 미국은 3대 0으로, 올림픽을 유치한 프랑스는 자기 집 안방에서 5대 1로 우루과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결승전은 스위스와 치렀으며, 모두의 예상대로 3대 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우루과이 팀에 대한 예찬이 어느 정도였던가는 경기가 끝난 후, 하늘색 유니폼의 우루과이 선수들이 관중들의 감사에 화답하기 위해 축구장 밖의 육상 트랙을 한바퀴 돌 때, 프랑스 사람들이 보여준 열광적 환호에서 입증된다. 바로 이 때부터 시합에서 우승한 팀이 운동장의 트랙을 한 바퀴 도는 올림픽 전통이 생겨나서 오늘날 모든 경기에서 하나의 풍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당시의 최고 선수는 Héctor Scarone였다. Nacional팀 소속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Scarone는 1924, 1928, 1930년대의 세계 제패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28년 우루과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한번 세계 최고 축구팀임을 입증했다. 이 때는 처음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가 우루과이 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상대팀은 Colombes에서도 끈질기게 대항했던 네덜란드 팀이었다. 우루과이는 이 경기에서 2대 0으로 승리했다. 이어서 독일을 4대 1로, 이탈리아를 3대 2로 이기면서, 결승전은 숙적인 아르헨티나와 치른다. 양 팀은 두 번이나 결승전을 치러야 했다. 즉, 첫 번째 시합에서 동점으로 비겼기 때문에 사흘 뒤에 두 번째로 시합을 갖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시합에서 우루과이는 2대 1로 승리를 거뒀다.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바로 Héctor Scarone였다.

2년 후인 1930년에 올림픽과는 별도로 제 1회 월드컵 대회가 개최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FIFA는 월드컵 개최지를 몬테비데오로 정한다. 이것은 바로 FIFA가 우루과이 축구의 수준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가국은 13개국이었으며, 유럽의 여러 팀은 긴 항해를 우려해 참가를 포기했다. 우루과이는 다시 한번 세계에 축구 강국임을 보여주었다. 페루를 1대 0으로 이기고, 루마니아를 4대 0으로, 유고슬라비아를 6대 1로 이긴 후, 아르헨티나와 승자를 가리게 되었다. 아메리카 컵 대회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928년 올림픽에 이은 또 하나의 숙명적인 양국 대결이었다. 전반전에서 2대 1로 앞선 아르헨티나는 하늘색 유니폼 군단을 쳐부수리라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팀은 후반전에서 맹추격을 강행해 결국 4대 2로 승리했다. 동점골을 성공한 선수는 이번에도 Pedro Cea였다. Pedro Cea는 1924년의 네덜란드 전, 1928년의 이탈리아 전에서 동점골을 성공한 선수로 ‘올림픽 동점골 선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Iriarte와 Castro는 역사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나머지 두 골을 성공시킨다.

1930년대에 우루과이는 1930년의 몬테비데오 월드컵에 유럽 나라들이 참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응답으로 월드컵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루과이가 다시 세계 무대에 나선 것은 1950년이었으며, 이 때에는 완전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III.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무훈이 기록된 곳 마라카낭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다시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1934년의 이탈리아 월드컵, 1938년의 프랑스 월드컵 대회를 석권한 바 있었다.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Belho Horizonte에서 8대 0으로 제압하며, 결승에 진출한다. 단 한차례의 경기로 결승에 오르게 된 이유는 바로 대회 막바지에 포르투갈과 프랑스가 불참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결국, 결승에 오르게 된 브라질, 우루과이, 스웨덴, 스페인은 4팀 모두가 서로 경기를 펼치는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 세계에서 가장 큰 경기장으로 20만을 수용하는 마라카낭 경기장을 건설한 브라질은 승리의 월계관을 가져갈 수준의 팀이었다. 경쟁자인 아르헨티나가 자국의 최고 선수들이 콜롬비아 리그에서 활약하느라고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월드컵은 브라질과 우루과이 두 나라 중 하나가 주인이 될 것은 자명했다. 양 팀은 5월에 리오 브랑코에서 열린 바론 컵 대회에서만 세 번 격돌했다. 산 파블로에서는 우루과이가 4대 3으로 승리했고, 리오에서는 브라질이 3대 2, 1대 0으로 승리했다. 양 팀의 비슷한 수준은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브라질은 스웨덴을 7대 1로 제압했고 스페인에 6대 1로 승리한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에 2대 2로 비겼다. 그것도 2대 1로 지는 상황에서 주장 Obdulio Varela가 넣은 골로 겨우 동점을 만든 것이었다. 스웨덴에게도 2대 1로 지는 상황에서 종료 13분을 남기고 3대 2로 겨우 역전을 이뤘다.

브라질 국민의 열광적 분위기는 1950년 7월 16일 결승전 날이 다가옴에 따라 절정에 달했다. 거리의 플랭카드, 신문의 제목, 정치가의 연설, 승리를 목전에 둔 선수들에 대한 약속 등으로 브라질 전체가 들끓었다. 우루과이 팀 지도자들은 자국 선수들에게 결승까지 진출해 브라질을 맞아 싸우게 된 것만으로도 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Obdulio는 결승전에서 승리해야 진정한 의미로 장한 일이 되는 법이라고 맞받았다.

마라카낭 경기장에 이날 오후에 운집한 사람들은 22만이 넘는다고 한다. 우루과이가 스페인과 동점을 이뤘기 때문에, 브라질은 비기기만 해도 사상 최초로 월드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전반전에서는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브라질이 경기의 주도권을 쥐었고, 우루과이는 산발적인 기습 공격에 의존했다. 전반전은 무득점으로 끝났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브라질의 Friaza가 골을 넣었다. 브라질 군중은 환호했다. 우루과이 팀의 주장으로 실질적 리더였던 Obdulio Varela는 공을 팔 밑에 넣고 심판에게 Friaza가 오프사이드를 범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경기가 속행되기까지 한참 걸렸다. Obdulio는 동료들을 진정시키고,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자신의 태도로 열광에 들뜬 관중들의 축제에 제동을 건 것이다. 브라질 입장에서는 비기기만 해도이기는 경기인데, 게다가 1대 0으로 앞서가는 판이니 관중들의 귀를 찢는 듯한 환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선수 Schiaffino는 마라카낭 경기장을 일순간에 정적으로 몰아간다. 즉, 후반 21분에 동점골을 터뜨린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있던 푸른색 군단은 이 순간부터 더욱 더 공격에 치중하며 결국 전 세계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승리를 엮어낸다. 후반 34분에 Julio Pérez의 패스를 받은 Ghiggia가 골을 넣음으로써 키퍼 Barboza를 궁지에 빠뜨린다. 브라질 팀은 동점을 만들려고 동분서주하나 실패에 그친다. 우루과이는 이처럼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위대한 축구 경기의 승자가 되며, 1924년에서 1950년까지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면서 네 번째의 타이틀을 가져간다.

 

IV. 쇠퇴기

우루과이의 마지막 찬스는 1954년에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이었다. 당시 선수단은 1950년의 주역들로 구성된 강팀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2대 0으로 제압하고 스코틀랜드를 7대 1로, 영국을 4대 2로 이긴다. 그러나, 바로 영국과의 경기에서 세 번째 골을 성공시킨 팀의 위대한 주장 Obdulio Varela가 부상당한다. 팀은 결국 10명의 선수로 라우사나에서 헝가리 팀과 싸울 수밖에 없었고 준결승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 시합에서 공격을 담당하던 Julio César Abadie와 Oscar Míguez는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우중에 열린 시합에서 헝가리는 2대 0으로 앞서 나갔고, Juan Eduardo Hohberg의 두 골로 동점을 이루나 연장전에서 결국 헝가리에 4대 2로 패하게 된다. 골대에서 나오는 공을 Schiaffino가 다시 골대로 차지만, 불행히도 공은 진흙으로 인해 더 구르지 않았다.

우루과이는 1958년 스웨덴에서 열린 월드컵에 출전조차 하지 못한다. 파라과이에 패했기 때문이다. 1962년의 칠레 대회에서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로 인해 준결승에 오르지 못한다. 1966년에는 당시 챔피언이었던 영국을 개막전에서 만나 비기고, 프랑스를 2대 1로 제압하고 멕시코와는 무득점으로 동점을 기록하나 독일에 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1970년 멕시코 대회에서는 마지막 스타가 등장한다. 팀의 에이스였던 Pedro Rocha가 이스라엘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 팀은 브라질과 준결승에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1대 0으로 앞서가던 경기는 결국 3대 1로 역전 패하게 된다. 멕시코 시에서 브라질 팀이 있던 과달라하라로 이동해서 경기를 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싸운 우루과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이었던 브라질에 패배하고 만다. 우루과이는 독일과의 3, 4위 전에서 부당하게 패하며 4위를 차지한다.

1974년에는 불가리아와 비기고 네덜란드와 스웨덴에 패해 결승이 좌절된다. 1978년에는 볼리비아에게 예선에서 패해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월드컵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한다. 스페인에서 열린 1982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페루에 발목을 잡힌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몇몇 선수의 프로 근성 결여와 자신 있는 행동의 결여로 기대만큼 잘 싸우지 못한다. 우루과이팀은 16강에 오르나, 전 대회 챔피언이었던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패하고 만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턱걸이로 참가하나 로마에서 이탈리아에 패배한다. 첫 시합에서 스페인과 동점을 이룬 것이 끝내 우루과이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우루과이는 예선전에서의 졸속으로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번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에 우루과이는 마지막 기차를 타는 행운을 얻었는데, 남미 예선전에서 5위를 하고, 멜보른에서 열린 오세아니아의 챔피언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1대 0으로 패했다. 그러나 홈 경기에서는 3대 0으로 이긴 덕분이었다.

 

V. 축구와 우루과이 사회

20세기 초 부터 축구는 우루과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표팀의 좋은 성적은 전국을 들뜨게 하고 산적한 문제들을 잊게 만들었다. 따라서 축구는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는 갈등을 완화시키는 묘약이었다. Nacional이나 Peñarol팀의 승리는 국민의 절반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우루과이인 들에게 축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1997년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된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우루과이가 준우승했을 때 벌어진 일을 들 수 있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에 1대 0으로 앞서다가 결국 2대 1로 역전패 했으나, 몬테비데오 인구 백 사십만 중에서 오십만이 추위와 비를 무릅쓰고 거리로 뛰어나와 어린 선수들을 맞이한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출전이 확정되자 전국이 거대한 축제장으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도 축구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루과이 어린이들에게는 축구공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전국의 직장, 거리, 어떤 종류의 모임에서건 축구는 반드시 등장하는 대화의 테마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전자 오락이 없이 자란 필자 나이 시대인들 에게는 거리나 도시마다 널려 있는 공터에서 축구공을 차는 것 보다 더 좋은 장난은 없었다. 방과 후 시간은 으레, 가죽이나 심지어 헝겊으로 된 축구공을 차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헝겊 축구공은 읽은 신문을 양말에 꽉 채워서 만든다. 가죽 공은 너무 잘 튀기 때문에 웬만한 기술로는 다룰 수 없는 공이었다.

아이들이 공을 차며 노는 시간이 엄청 많았다는 것은 바로 공을 다루는 경험과 재주가 있어야 형성되는 공차기 기술의 발전과 정비례했다. 여기에는 이유조차 찾을 필요가 없다. 기본기가 완벽한 상태에서 개성과 기질이 접목하면서 낳은 결과가 바로 우루과이 선수들이었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팀의 위대한 승리였다. 기술과 장시간의 연습은 우루과이인들의 국민성처럼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룩되는 공 다루기 재주를 발전시킨 것이다.

축구로 인한 열정은 우루과이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독특한 하나의 현상을 낳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유소년 축구(Baby fútbol)라 불리는 것이다. 마이너 리그 구단에 참여하기 전에, 우루과이에서는 우선 ‘baby fútbol’ 팀에 가입한다. 각 팀은 7명의 선수로 구성되며 축구장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다. ‘baby fútbol’ 축구장이 없는 동네는 하나도 없다. 부모 모두가 직장에 나가 자식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진 상태에서 가정은 청소년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축구 클럽은 가정 대신에 이들을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축구 클럽에서 부족한 사랑과 애정을 찾게 되며, 운동 연습에 필수적인 음식까지 공급받는다. 국가 유소년 축구 조직 위원회는 전국적으로 68개의 리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리그 소속 구단은 모두 567개, 참여 소년들은 등록된 숫자만 53,500명이다. 이중에서 여자아이들은 불과 30명이다. 6세에서 13세까지의 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이 유소년 클럽에는 8개의 등급이 있으며, 각 등급은 생일에 맞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우루과이는 전통적으로 교육열, 높은 교육 수준, 두터운 중산층을 가진 나라로 명망이 높았다. 이 중산층의 관습이 바로 우루과이 국민의 생활 방식에 밀접한 영향을 준다. 최근 수십년 동안 우루과이 국민 전체에 영향을 준 것은 경제 침체이다. 세인의 주목을 받던 우루과이 대학은 한 때는 공교육, 무상 교육, 비종교적 교육, 수준 높은 교수 층 등으로 전 미주 지역에서 학생들이 유학을 왔었으나, 이제 그러한 명망은 옛 일이 되어 버렸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립대학들이다. 우루과이의 3.1%의 문맹률은 라틴아메리카 전체 수준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낮은 것이라고는 하나, 국민의 문화적 수준은 하향했다. 옛날의 중산층은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이들 중 소득이 높아진 소수는 상류층의 일원이 되었으나, 대다수는 경제적 고충으로 인해 저소득층에 흡수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어린 나이에 직장을 찾는 젊은이의 숫자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학업을 외면하고 운동할 시간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성들의 소득이 증대하면서, 파출부나 할머니의 손에 키워지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따라서 자녀 교육에 대한 가정의 역할이 감소하게 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이유들은 우루과이 축구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학업에 쏟는 시간의 부족으로 지적 수준도 낮아지고 있다. 오늘날의 축구는 더욱더 두뇌를 요구하고 있다. 점점 더 좁은 공간에서 공을 차며 더욱더 빠른 속도로 게임을 진행한다. 매일 매일 지적으로 연마를 해야 두뇌 회전이 빨라지며, 그래야 축구장에서 맞부딪치는 여러 가지 상황에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빨리 대처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미 축구를 할 줄 아는 청소년들에게는 학업을 병행시킴으로써 지적인 수준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축구는 훌륭한 기술을 요한다. 속도감 있는 게임은 이 전의 축구보다 더 정교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교하지 않으면 공을 놓칠 것이고, 골을 넣지 못하게 된다. 축구 전술은 기술과 발을 맞추게 되어 있다. 기술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룩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유소년 축구와 프로 축구팀에서 선수들이 적절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도록 능력 있는 전문가를 구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축구공을 접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교성은 끊임없는 반복으로 얻어지는 것이므로 올바른 교육을 통해 반복 연습을 시킴으로 인해 비교적 단 시간 내에 기술을 연마시켜야 할 것이다. 현재 우루과이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교육적 지식과 축구 지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과정들이 개설되어 있다.

경제침체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참 자라날 아이들의 영양이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어린이 체육 교육이 줄어드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공립학교에서는 4학년까지 체육 교사가 부족한 실정이며 그 이상 학년에서도 체육 교사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프로팀들이 선수들이 입단한 후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비타민, 다이어트, 체력 훈련도 너무 때가 늦어 만시지탄이 되어 버린다.

우루과이 축구 몰락의 또 다른 원인은 각 팀에서 천성적 자질을 갖춘 지도자들이 배출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항상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어 왔다. 예로 1924, 1928, 1930년의 José Nasazzi, 1950년의 Obdulio Varela가 있다. 이들은 팀의 주장이었으며, 불굴의 정신을 가졌고, 동료와 상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우루과이 축구가 이러한 상황에 빠져든 반면, 우리의 경쟁자들, 특히 북반구의 라이벌들은 소년들을 유년 시절부터 체력 훈련을 시켜서 축구 선수로 키웠다. 유럽인들은 상당 기간, 카메라맨들을 남미에 파견해서 트레이닝 장면이나 경기 장면을 필름에 담았다. 남미 축구의 모든 것을 완벽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유럽 감독들은 아메리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하는지 그 까닭을 규명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경기 스타일이 공을 접하는 많은 시간과 경험의 소산에서 나오는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었으므로, 우리의 축구에 대해 왜라는 의문 부호를 붙이지 않고 있었다. 우루과이 축구가 모든 면에서 파행으로 치닫는 동안, 라이벌들은 많은 면에서 진전을 거듭했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차이로 이어지며 큰 경기에서 우루과이가 더 이상 전면에 떠오르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된다. 단지 어떤 비범한 세대가 출현한다면 말레이시아에서 1997년에 열렸던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듯 그런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올바른 정신력, 뿌리깊은 프로 의식, 단단한 개성과 타의 모범이 되는 기술력을 겸비한 자들로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VI. 신생 체육부

축구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우루과이 스포츠의 파행 상태로 인해 2000년에 체육 청년부가 만들어진다. 이 부서는 스포츠 재건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체육부의 최종 목표는 우루과이 사회의 모든 활동, 즉, 자유롭고 자발적인 형태 혹은 규범적인 형태의 활동에까지 체육 활동, 스포츠, 레크리에이션의 영역을 확장하자는 것이다. 체육부를 창설할 때에, 앞으로의 활동을 계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스포츠 현황에 대한 치유책도 제시되었다. 체육부가 파악한 당시의 상황을 보자.

국민의 소수만이 체육 활동을 하거나 스포츠를 생활화하고 있으며, 우루과이 체육의 국내외 스포츠 행사 참석률은 극히 저조했다. 당시의 체육 정책은 구태의연하며 산만하고 불충분했다. 국내 체육 기반 시설이 부족하며 체육을 이끌어 갈 인적 자원도 부족했다. 심지어 체육관련 기관이나 클럽조차 등록되어 있지 않으며, 체육 조직 모델에서의 역할조차 정해지지 않은 형편이었다. 국내에 2750개의 클럽이 있어서 각종 시합을 벌이기는 하나 기술적 차원에서 적합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기보다는 동호회 수준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기술적 지원과 시설 지원을 필요로 했다. 체육 연맹의 역할에 알맞은 틀조차 없었다. 그러한 활동을 위한 보호나 감독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현 상황에 맞는 국제적 대표성과 자유로운 체육 활동을 보장하는 계획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들 기관의 예산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체육 활동을 할 정도가 안되며, 심지어 그들의 활동을 평가할 객관적인 지표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수준 미달의 팀이나 운동가가 대다수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의 활동도 내륙에 상당수 운동선수들이 있던 시절에도 수도인 몬테비데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체육 시설들의 디자인, 상태와 질도 상당히 수준이 낮은 것이어서 이들의 활용 빈도도 상당히 빈약했다. 이것은 이들 시설들의 기구를 왕성히 사용할 활동 프로그램이 결여되어 있으며 활동 모델이 없는 것에도 기인한다. 전문가 양성 계획도 그 계획의 수준이 상당히 높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약을 안고 있다. 다양한 양성 계획이 부족하며 여러 과정 내용도 현대화야 할 것이다. 일례로 스포츠의 효율성, 스포츠 조직, 활동 및 제반 시설, 공동체적 스포츠 활성, 레크리에이션과 같은 것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기초와 중간 단계 양성 프로그램도 부족한 편이다. 스포츠의 재정 지원도 추구하는 목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정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산발적이었다. 여러 국가 기관이 정부 정책과 협의 없이 시행되는 스포츠 활동에 상당한 지원을 해 왔다.

체육 교육과 학교 체육은 엄청나게 부족하며 고비용이다. 우루과이의 35% 학생만이 적정 수준의 체육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과목은 교육과정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있다. 나라 전역을 상대로 하는 학생 체육 대회는 전무하다. 유년 체육은 어린이의 체력과 정신 발전만을 경쟁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지도자 대부분은 올바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지원자들이다. 60,000명의 재학생이 있는 국립 대학교는 학생들의 체육 활동과 연습을 조직하거나 증진하는 프로그램이 없다. 체육은 대학 과정에서 필수 과목도 아니다. 오히려 학교가 아닌 대학 체육 연맹이 대학을 마쳤거나 재학 중인 선수들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요일 아침에 축구 경기를 하게 한다.

위와 같은 상황을 똑바로 파악한 신생 체육부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삼는다.

1. 연령, 성별, 신체적 능력, 사회 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체육 활동과 스포츠를 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2. 국가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고효율 스포츠의 경쟁력을 제고한다. 또한 체육 활동을 왕성하게 하기 위한 경쟁력을 고취한다.

3. 효율성과 능률을 높이기 위한 체육 활동과 조직을 마련한다.

4. 교육 체제에 체육 교육을 공식적으로 포함한다.

5. 폭력과 도핑에 대항하는 스포츠 윤리성을 고양한다.

6. 국가의 체육 체제에 법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7. 체육 전반을 기획한다.

 

VII. 축구와 우루과이 경제

우루과이 인구는 3,332,141명이며, 이 중에서 1,406,169명이 수도인 몬테비데오에 산다. 인구밀도는 1 km²당 18.9명이며 인구 증가율은 1000명당 6.7명이고, 출생은 16.3, 사망은 9.3이다.

경제활동 인구는 약 59.6%이며, 이 중에서 3.4%가 농수산업에, 14.4%가 제조업에, 7.8%가 건설업에 그리고 23.2%가 상업, 5.2%가 운수, 교통업, 8.7%가 금융업 및 회사에, 37.5%가 공무원 및 기타 공공 기관에 종사한다. 실업률은 현재 15%이며, 작년에 이 수치는 급격히 증가했다. 비 경제활동 인구 중 22.4%는 가사에 종사하며, 15.5%의 학생, 52.7%의 퇴직자 및 연금 수혜자, 1%가 사채업이며 기타 8.4%로 구성된다. 국민 1인당 GNP.는 $6006이며, 남미에서 우루과이보다 높은 유일한 나라가 아르헨티나로 20세기말에 $7500이었다. 수명은 74.3세이며, 인구당 KWH는 2184이다. 개인별 쇠고기 소비량은 년 간 46.2kg,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9.5이다. 전화 보급율은 1000명당 330대, 자동차 보유 비율은 인구 5.8명당 1대, 의료 시설은 의사 일인당 269명, 병원 침대 1대당 197명이고 철로는 2167km이다.

1985년 민주주의가 부활되면서 기나긴 경제 침체기도 끝난다. 이어서, 경제 정책에서 본격적인 변화가 마련된다. 국내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급여가 상향조정되었으며, 채권국들과의 협상을 통해 외채 상환을 연기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로의 수출이 증대하며, 국제 이자율이 감소하면서 외채 지불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와 졌으며, 재무 체계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환율이 안정되었다. 이로 인해 투자 분위기가 고조되어 자본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1988년과 1989년, 주변국들의 경제 안정 실패로, 생산성이 제자리를 맴돌고 투자가 감소하면서 우루과이 경제는 침체를 겪는다.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인플레는 1990년에 물경 129%로 상승한다.

90년대에는 환율 정책과 재정에서 인플레를 잡기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이 펼쳐진다. 무역 균형에서 적자가 파생되며 국가는 이 적자를 외국 자본 유입으로 해결한다. 1995년부터 재정 적자 감소, 국제 무역 증대, 외국 자본 유치라는 길을 통해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시도된다. 인플레의 감소는 환율 정책, 무역 개방, 석유 같은 제품의 가격 하락과도 관련이 있다. 경제적 활력 약화는 주변국들의 어려움과 자본 유입의 감소에 기인한다. 또한 떼낄라 위기, 동남 아시아의 경제 위기, 러시아 지불 유예, 1999년의 브라질 평가절하 등과 같은 국제적인 문제로 인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와 같은 MERCOSUR 국가들이 상당한 경제위기를 겪는다. 브라질의 평가절하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침체로 연결되며 우루과이 제품의 경쟁력 상실로 연결된다. 인근 국가들의 환율 정책의 조화가 깨어진 것이다. 2001년 12월의 아르헨티나 위기는 우루과이에 치명타를 안겼다. 산업은 29%가 감소했으며, 1차 산업은 약 5%가 감소했다. 이것은 1차 산업 제품의 가격 하락과 외국과의 경쟁력 하락으로 우루과이 국민 총 생산량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반면, 서비스업은 58%에서 79%로 증가했다.

우루과이는 수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기준 환율의 소폭 변동으로 이에 대처하고자 했다. 또한 Jorge Batle 대통령은 국가 재건에 수년이 소요될 심각한 아르헨티나의 위기와 브라질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야기된 MERCOSUR의 어려움 앞에서 미국과 칠레에게 교역을 증대시킬 것을 요구했다. 우루과이가 외국과의 약속 이행에서 보여준 행동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우루과이를 이 지역에서 가장 믿을 만한 나라이며 진지한 나라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축구에 들어가는 비용은 국민 총 생산량의 약 0.5%로 본다. 참고로 브라질은 1.3%를 사용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축구 선수들의 이적으로 국내에 외화가 유입되고 있다. 몇몇 경우에는 그 액수가 상당하다. 예로 지난 1월에는 우리의 간판 선수인 Diego Forlán이 영국의 Manchester United로 천 만불의 이적료를 내고 이적했다. Diego Forlán은 1966년의 아메리카 챔피언으로 60년대를 주름잡던 Peñarol팀의 Pablo Forlán의 아들이다. 작년 이탈리아 언론은 우루과이의 Alvaro Recoba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비싼 선수라고 보도했다. Recoba는 Danubio팀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Nacional에서 뛰다가, 지금은 이탈리아의 밀라노 팀의 수비를 맡고 있다. 축구 선수들의 해외 진출은 외화 유입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로 인해 이적료의 10%를 세금으로 내도록 하는 새로운 법이 생겨났다.

우루과이 가정들의 경제적 빈곤은 좋은 신체적 조건을 지니고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축구에 전념시키는 현상을 낳고 있다. 이들이 학업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두각을 드러내기만 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로 가는 지름길을 얻게 되어 약 1세대 이상까지 가족들을 경제적 빈곤에서 구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축구팀들의 가난은 그들의 예산이 항상 적자라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젊은이들을 이적하는데 만 힘을 쏟을 수밖에 없으며, 이들이 귀국할 때쯤이면 이미 선수로서 사양길에 접어든 때이므로 국제적인 게임에서 효과적으로 경기할 수 없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봐야 할 것이다. 즉, 많은 경우에는 선진국의 돈의 유혹 앞에서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우루과이를 떠나고 있다. 유혹에 빠져서 자신을 망치기도 하고 자신의 자질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자식들의 성공에 목숨을 건 부모들의 태도도 이들의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자식들의 축구와 관련된 일에 참견하고 그릇된 충고를 함으로써 이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이들 부모들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기 위해 부모들을 교육할 필요까지 생기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로, 나이든 선수들은 더 이상 어린 선수들의 이상형이 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Poyet, Fleurquin, Bengoechea 감독의 이름은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다. 이들은 명석함, 교육, 전문성 및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로 동료들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우루과이 젊은이들의 기술 형성과 정신력 형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다면,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어른들이 없다면, 축구 세계에서 일류급으로 부상해서 그 위치를 계속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부터 월드컵에서는 우루과이 대표팀의 존재가 미미해졌다. 1983년의 브라질, 1987년의 아르헨티나에서 각각 개최된 아메리카 컵 대회에서는 우루과이가 승리했다. 1995년의 승리는 개최지가 우루과이였으므로 홈코트의 이점을 맘껏 살렸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클럽 팀 경기에서는 1988년 Nacional이 아메리카 챔피언에 등극한 이후, 이겨 본 적이 없다. 1989년에는 Recopa y la Copa Interamericana에서 승리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이 한국팀과 더불어 훌륭한 경기를 펼치기를 고대한다. 또한 아름다운 나라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 한국의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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